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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객망리를 범치 못함
  •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멀지 않은 도마다리 야산(道橋山)에 진을 치니, 인근 객망리 사람들이 동학군과 관군의 격돌로 인한 폐해를 염려하나
  • 성부께서 워낙 힘이 센 장사로 알려져 있는 데다 증산의 신이하심을 두려워하여 관군과 동학군 모두 황토마루 너머 객망리 부근은 근접치 못하더라.
  • 청국과 일본의 개입
  • 4월 7일 새벽에 동학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고 그 기세를 몰아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해 나아가니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더라.
  • 이어 23일에 동학군이 장성 황룡촌(長城 黃龍村) 전투에서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관군을 대파하고 북으로 전주를 향해 진격하니
  • 홍계훈이 관군만으로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국군 차병(借兵)을 조정에 요청하니라.
  • 이 때 청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니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라.
  • 동학군이 27일에 전주를 점령하니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마침내 청(淸)에 차병을 요청하거늘
  • 5월 초순에 청국군 3천여 명이 아산(牙山)으로 들어오니
  • 때를 엿보던 일본군 또한 곧이어 4천여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매 삼천리 강토에 짙은 전운(戰雲)이 감돌더라.
  • 10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대치하던 관군과 동학군은 잇단 외세의 개입을 경계하여 화약(和約)을 맺으니 이로써 동학군이 일단 해산하니라.
  • 11 이에 조정에서는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청하고 청 또한 일본에 동시 철군을 제의하였으나, 일본은 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과 조선의 내정개혁을 구실로 이를 거부하니라.

  • (증산도 道典 1:49)




  • 6절 49:6 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 이토 히로부미. 1905년에 설치된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 한국 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