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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명숙이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킴
  •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 사람 전명숙(全明淑)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난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으니라.
  • 일찍이 전명숙은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부터 3년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흥선대원군을 만난 일이 있더니
  • 대원군이 명숙의 뜻을 물은즉 “제 흉중(胸中)에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오.” 하고 대답하니라.
  • 거사를 만류하심
  • 증산께서 명숙과 나이 차이는 많이 나나 일찍부터 교분이 있으시더니
  • 갑오년에 하루는 명숙이 찾아와 말하기를 “내가 민생을 위해서 한번 거사를 하려 하니 그대가 나를 도와주시오.” 하거늘
  • 증산께서 그 전도가 이롭지 못함을 미리 아시고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 하시며
  • 성사도 안 되고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 하고 경계하시니라.
  • 이에 명숙이 대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안 된다면 나 혼자라도 하겠소.” 하고 물러가니라.
  • 혁명의 대세를 지켜보심
  • 혁명이란 깊은 한(恨)을 안고 일어나는 역사의 대지진인즉, 동방 조선 민중의 만고의 원한이 불거져 터져 나온 동학혁명으로부터 천하의 대란이 동하게 되니라.
  • 10 증산께서 후천개벽을 알리는 이 큰 난의 대세를 지켜보고 계셨으니, 이 때 증산은 성수 스물넷이요 명숙은 마흔 살의 백의한사(白衣寒士)더라.
  • 11 개벽의 새 시대를 알린 이 혁명은 갑오년 정월과 3월, 9월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니라.

  • (증산도 道典 1:43)




  • 2절 43:2 전명숙은 기병하기 3년 전부터 흥선대원군 문하에 출입했다. 그 때 끝까지 구하는 바가 없으므로 대원군이 이상히 생각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그는 다만 “벼슬에 뜻이 없노라.” 하며 돌아갔다. 전명숙이 3년간 서울에 머문 것은 서울의 군사적 형편과 정치적 허실을 조사하기 위함이었으니, 이미 오래 전부터 혁명의 뜻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천도교 창건사』>
  • 4절 43:4 안내성 성도의 아들 안정남, 안필성의 손자 안일완(1940∼ ), 이직부 성도의 아들 이석찬(1915∼2004), 고수부님의 성도인 이용기로부터 성언을 전해 들은 조정수가 이구동성으로 증언한 내용. 전명숙이 장내리 조소 마을에서 훈장으로 있을 당시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증산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9절 43:9 동학혁명. 동학의 바탕에는 종교적인 요소와 농민전쟁의 요소가 동시에 깔려 있어서, 논자에 따라 달리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경신년에 최수운 대신사가 상제님께 천명과 신교를 받아 선포한 동학의 본래 주제는, ‘侍天主造化定’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궁극적 실현이 상제님 강세와 상제님 무극대도의 출현으로 이루어진다. 혁명이란 원래 이전의 체제를 뒤집는 변혁을 뜻한다. 동학은 그 주제가 선천에서 후천으로 시명(時命)을 바꾸는 것이며, 선천 인류사의 생장 과정을 마치고 성숙과 통일의 후천 가을 대개벽기를 맞아, 천지에서 인간과 신명의 씨종자를 추리는 서신사명의 명(命)을 집행한다는 의미에서 ‘천도(天道)혁명의 출발점’이라 규정할 수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