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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산 상제님의 성혼(聖婚)
  • 혼기에 이르시매 부모님께서 매파를 두어 여러 차례 간선(揀選)을 하시는데
  • 증산께서 매파가 주선한 규수 집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 집 선대의 가계와 친족의 인품과 악습, 악성(惡性) 등을 물건 보듯이 낱낱이 말씀하시니 쉽사리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니라.
  • 마음에 드는 며느릿감을 구하지 못한 채 몇 년을 보내니 마침내 혼삿길이 막히게 된지라
  • 성부께서 간선을 너무 까다롭게 하셨음을 깨달으시고, 자부(子婦)의 덕성은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그 뒤로 어디서든지 청혼이 들어오면 즉시 허혼하리라 마음을 정하시니라.
  • 이 때 ‘꼬시래기’라 불리는 잔뫼절의 화주 전광명화(全光明華)가 잔뫼산 일대를 두루 다니면서 포교하고 시주도 하여 주변 고을의 사정에 환하더니
  • 증산께서 스물한 살 되시는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 늦가을에 마침 하동 정씨(河東鄭氏) 문중의 규수를 중신하거늘
  • 성부께서 즉시 허혼하고 자부로 맞이하시니 이름은 치순(治順)이요 나이는 열여덟인데, 몸이 정상이 아니요 성정(性情)이 원만하지 못하더라.
  • 그 해 겨울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증산께서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여 금구 내주평(內注坪)의 정씨 가문에 장가드시거늘
  • 처가에서 첫날밤을 보내시고 이른 아침에 조용히 신방을 나와 세수하신 뒤 그 집 서당에 가 계시니 하인들이 아침밥을 해서 올리니라.
  • 10 이후 그 집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시니 사도(師道)가 비범하여 주위 사람들의 경애를 받으시니라.

  • (증산도 道典 1:37)




  • *** 37장 강석환은 14세 때 성혼하셨다고 증언하여 『도전』 초판에 채택하였으나, 그 후 여러 증언과 자료를 확인한 결과 21세로 판단되어 바로잡는다.
  • 5절 37:5 꼬시래기. ‘전광명화’ 또는 ‘전씨 부인’‘전씨 보살’로 불리며, 잔뫼산 암자에서 일생을 보냈다. 1900년경에 잔뫼절을 중창하였고, 1920년경에는 정읍 정토사에 칠성각을 세우기도 했다. “머리가 꼬실꼬실 한게 ‘꼬시래기’라고. (중략) 우리 동상도 그 사람이 중신해 가지고, 처갓집에 재행 가서 미친개 물려 죽었어.” (김호연 성도 증언) “머리가 꼬실꼬실 하고, 눈이 쌍꺼풀지고, 아주 얼굴이 예쁜 얼굴이에요. 그리고 키도 후리후리하니 크고, 말을 잘해요. (중략) 시주를 해서 절을 지을 정도니, 옛날로 봐서는 활발한 여자지. 늘 한복, 비단옷을 입고 곱게 챙기고…. 귀부인 스타일이야.” (잣뫼산 산주 은길동 증언)
  • 5절 37:5 잔뫼산. 배산(杯山), 정읍시 신태인읍 백산리에 있는 산. 모양이 술잔을 엎어놓은 형상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 지금은 ‘잣뫼산’ 또는 ‘백산(柏山)’으로 불린다.
  • 5절 37:5 잔뫼절. 잔뫼산 중턱에 있는 암자. ‘소이암(笑而庵)’으로도 불렀다. 지금은 절터와 그 아래에 이갑룡 처사가 쌓은 돌탑(적석탑)만 남아 있다.
  • 7절 37:7 정치순(鄭治順, 1874.1.29∼1928.8.15). 본관 하동(河東). 전북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鳳南面 內光里) 내주평에서 출생.
  • 7절 37:7 성정이 원만하지 못하더라. 얼굴에는 숯이 있고 얽었으며 사팔눈에 다리를 절고 성질이 온순치 못하여 시부모와 불화가 잦으며 상제님과 인간적인 대화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3일간 내주평 처가에 머무실 때 상제님은 불평 어린 표정을 짓지 않으셨으나, 부모님은 자부가 불구임을 아시고 낙담과 충격이 크셨다고 한다. 김호연 성도 증언에 따르면 시집올 때 관디(冠帶)벗김을 해 오지 않았다고 한다.
  • 8절 37:8 그 해 겨울. 음력 12월 10일이라는 증언도 있다.